지리산에서 놀고있는 이영철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 몽골의 중원 지배사 >
한자(漢字)라는 명칭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해서와 판각체의 시대
목차
1. 한자의 지나온 세월을 정리해보니
2. 창(娼)보다 못한 유(儒)의 지적 자산, 원나라 때의 한자
3. 몽골인가 몽고인가?
한(漢)은 물론 ‘한나라’를 뜻한다. 자(字)는 ‘문자’이다. 너무 당연하지만. 이 단어는 몽골족이 중원을 지배했던 사실을 기록한 『원사(元史)』에 맨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의 칭기즈칸은 자신들의 언어에 맞는 서역의 표음문자를 본 떠 몽골문자를 만들었다. 그 후 원나라의 이름으로 중원을 지배하면서 자신들의 문자와 한족의 문자를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민족적 자부심이 강했던 그들은 피지배층인 한족의 문자를 ‘한자’로 구분해 불렀는데, 그 속에는 의도적인 멸시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훗날 역사는 결국 다시 한자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1. 한자의 지나온 세월을 정리해보니
여기서 잠시 한자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보고 가기로 하자.
송나라를 이어 중원에 들어선 원나라와 명나라를 거치면서 한자는 발전의 맥이 꺾이고 만다. 돌이켜 보면 한자는 끊임없는 자기 변화와 모색을 통해 살아남은 치열한 생물이었다.
갑골문에서 비롯된 상상의 세계와 시각적 미감은 한자가 성숙한 상형문자로 발전할 수 있는 양분으로 작용했다. 그 양분을 풍족하게 이용하면서 발전한 것이 주나라 때의 청동기문자였다. 그림과 부호의 혼돈, 성숙과 미성숙의 섞임이 어지러웠지만 한자는 청동의 견고한 질감과 그림에 기댄 주술의 힘으로 중원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특히 주나라 때 이루어진 상형과 주술의 결합은 결국 한자가 상형문자로 남아 있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 후 한자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서로 다른 지역적 특성을 통해 다양성을 기른다. 이른바 6국의 분화는 결론적으로는 한자 글꼴의 조형미를 오히려 북돋우는 역할을 하고 만 셈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만난 진시황, 이제 한자는 문화 조정자로서의 역할 대신 정치적 통합자의 기능을 부여받게 되었다. 버거운 듯 보였던 상형의 글꼴들은 이제 진시황의 정치권력에 기대어 중국을 통일해내는 일등공신으로 다시 태어난다. 통일된 상형의 글꼴 한자가 있는 한 어떤 방언의 유혹에도 중원은 절대 쪼개지지 않을 것이다. 중국 문화 일통(一統)의 기초가 놓인 것이다.
중원의 통일로 거대한 문화적 지평을 확보한 한자는 한나라가 마련한 유교 이데올로기를 통해 걸쭉한 정신적 자양분을 빨아들인다. 유교 이데올로기가 전 중원을 지배하게 된 순간 한자는 자연스레 지배층의 뇌리에 자리하면서 정신적 통치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한자가 지니는 조용한 오만은 이렇게 태어났다. 또 예서의 속화를 통해 마련된 글꼴 내부의 안정 역시 한자가 이제 여간한 충격으로는 흔들리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한나라를 겪은 한자는 위진남북조라는 문화의 뒤섞임 현상 속에서 단련을 받는다. 남방의 문화와 북방의 문화, 불교, 도교가 뒤엉긴 중원에서도 망가지지 않았는데, 내면적인 부수나 부호들은 흩어지지도 뒤섞이지도 않았다. 혼란의 시기는 오히려 남북문화의 독특한 예술적 감성을 글꼴에 담아주는 행운의 시기로 변하고 말았다.
혹독한 내련(內煉)의 역사를 통과한 한자는 당나라에 들어서면서 이세민이라는 사내를 만난다. 그는 황제이자 예술가였다. 또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정돈시켜야 하는지 아는 문화적 CEO이기도 했다. 한자와 당 태종 이세민의 만남은 진시황 이후 다시 한 번 갖게 된 의미 있는 조우였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해서라는 표준 글꼴을 디자인했다. 예뻤다. 그보다 아름답게 부수와 부호들을 담을 수는 있는 그릇은 없었다. 중원뿐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의 지식인들까지 그 글꼴에 넋을 잃었고, 드디어 한자가 동아시아의 표준 글꼴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였다.
당나라를 마지막으로 한자 글꼴의 변환은 이제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송나라의 지식인들은 그 사실을 절감했다. 한자의 글꼴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해서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당나라 해서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필획과 점의 비틀기를 통한 의(意), 즉 개성의 표출 정도가 전부였다. 1억 가까이 불어난 인구와 서적을 원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한자 글꼴이 불러일으킬 시각적 흥미는 더 이상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한자가 담고 있는 살아 있는 정보를 원하고 있었다. 이제 글꼴의 변형은 더 이상 시도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지난 세월 역사 속의 한자의 모습이었다. 이제 어쩌면 한자 글꼴의 전성시대는 가버린 느낌이었다. 이제 한자는 진정 말 그 자체의 대변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문자란 단지 언어의 껍질에 불과해야 했다. 소리로서의 언어와 정신으로서의 의미를 빼버리고 나면 문자란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처럼 초라해야 했다. 하지만 한자의 글꼴은 지나친 대접을 받아왔다. 주술과 예술, 그리고 심지어 정치 영역까지 넘나들며 권위를 키워왔다. 그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송나라의 몰락과 함께.
많은 사가들이 지적하듯이 송의 자유스러운 지적 분위기가 결국은 나라의 쇄락을 불러온 것처럼, 그 시기의 한자 역시 글꼴의 개성 표출과 함께 상형으로서의 내적 영향력을 잃어갔다. 한자 발전의 맥이 꺾인 것이다.
한자가 상형문자로서의 내적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잃어 가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와 명나라를 거치면서였다. 원나라는 몽골이라는 이민족이 세운 국가였기에 한자에 대한 소원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민족인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에 한족의 정신을 다시 세운 정치집단이다. 결과적으로 명나라는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문화 자산을 중국인들에게 선사했던 정치적 실체였다. 그럼에도 상형으로서의 한자의 존재는 그 시대에 더욱 옅어지고 만다. 역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역설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잠시 하려 한다.
2. 창(娼)보다 못한 유(儒)의 지적 자산, 원나라 때의 한자
역사의 물줄기 앞에서 개인은 무의미하다. 하물며 소낙비처럼 한번씩 훑고 지나가는 중원의 정치적 소용돌이 앞에선 개인은 더욱더 무의미했다. 송나라의 개성, 개인의 독특한 삶의 색상이었던 의(意)의 세계 역시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녹아버린 달팽이처럼.
개성의 다양한 표출은 결국 송나라의 힘을 더욱 약화시켰다. 중원은 역시 강력한 힘에 의해 지배되는 공간이었다. 피학에 익숙한 중국인들은 강력한 통치가 자신들을 이끌어줄 때를 늘 태평성대라고 불렀다. 그런 점에서 송나라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더구나 황허 이북에는 당시 세계 최고의 기병들이 있었다. 몽골족들의 말은 갈기가 살아 있었고 어디론가 달려야 했다.
1271년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중국명: 忽必烈-호필열)은 중원을 통일하며, 나라 이름을 대원(大元)으로 불렀다. 중국의 역사학자 중에는 이 역사의 등장을 일컬어 중국 역사 속의 삽입곡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낯선 사람들끼리의 만남이었다.
몽골족들은 일찍부터 중원을 탐했었다. 특히 송나라가 있던 강남은 생선과 쌀의 고향이었다. 생선은 달고 쌀은 차질었다. 뒤늦게 확인했지만 사마천의 말이 맞았다. 강남은 참으로 어미지향(魚米之鄕)이었다. 하지만 몽골족들에게 한자는 낯설기만 했다.
3. 몽골인가 몽고인가?
몽골은 원래 선비족과 실위(室韋)족에서 성장한 종족들로 돌궐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Mongol’로 불렀다. 문자가 없던 민족이기 때문에 자신들을 표기할 수 없었지만 중국인들은 그 발음을 듣고 망흘록(忙忽勒)으로 표기했다. 당시의 중국어로 읽어보면 ‘망후러’ 비슷하게 발음이 되는데 유사음을 표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발음을 들은 거란인들은 한자를 사용해서 몽고리(蒙古里)라고 표기했다(인류의 언어를 통해 살펴보면, H음과 K음은 모두 목구멍 근처에서 나는 소리로 서로 섞여 사용된다). 그리고 여진족들은 이 표기를 다시 자신들의 언어에 맞게 바꾸면서 끝의 리(里)를 제거했고, 두 개의 한자만을 사용 몽고(蒙古)라고 썼다.
한국 사회가 한동안 사용한 ‘몽고’라는 발음은 바로 여진족들이 남긴 표기를 중국인들이 사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몽골어 발음에 근거해 다시 몽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 몽골인들에게 한자는 발음이 어렵고 쓰기도 힘든 문자였다. 문자가 없었던 몽골족들에게 한자는 정신적 혹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 복잡한 막대들을 이리저리 붓으로 옮겨놓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몽골족들이 보기에 한족들은 그 생산성 없는 문자를 붙들고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그들은 결론도 없는 허상을 붙들고 갑론을박하기를 즐기고 있지 않는가.
쿠빌라이 칸은 이 생산성 없는 한족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결정했다. 바로 민족차별정책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는 중원에 거주하던 민족들을 다음과 같이 네 부류로 나눈 뒤 서열을 정해주었다.
1. 몽고인(蒙古人-몽골인)
2. 색목인(色目人-중앙아시아 거주 민족)
3. 한인(漢人-북방에 거주 하던 중국인, 거란족, 여진족 등)
4. 남인(南人-남방 중국인)
이렇게 되고 보니 황허 유역의 중국인들은 세 번째, 양쯔 강 유역의 중국인들은 최하층이었다. 골격이 크고 허우대가 좋은 북방 중국인들이 키가 작고 몸집이 작은 남방 중국인들보다 좋게 평가된 이유는 아마도 자신들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 있어 실망스러운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쿠빌라이 칸은 이번에는 직업을 다음과 같은 열 단계로 나누었다.
1. 관(官-중앙의 고위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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